Y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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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 말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아마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좀더 빨리 당신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떤 식으로 써야 내 마음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나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시간을 질질 끌고 말았어요. 그 점에 대해선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요.

이제는 당신도 어렴풋이 알아차렸겠지만, 나에게는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요. 나는 3개월 가까이 그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어요. 상대는 일하다가 알게 된 사람으로 당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상대가 누구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결론부터 말하면, 두 번 다시 그와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에요.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은 완전히 끝난 일이에요.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위안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을 사랑했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 없어요. 그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부적당한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냐고 물으면 곧 대답할 수 있어요. 나는 유민씨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하면서 늘 행복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는지 묻겠죠. 나도 자신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묻곤 했어요. 어째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요.
하지만 나로서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나는 당신 이외의 연인을 가지고 싶다거나 다른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망을 전혀 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남자와의 만남도 처음에는 일 외의 다른 뜻은 없었죠. 그는 나보다 나이도 한참 위였고, 부인도 자식들도 있었으며, 남성으로서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아서, 깊은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난, 손님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내 프라이드를 여지껏 잘 지켜왔죠.

다른 여자와 만나는 당신에게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 오거나, 다른 누군가를 아직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요. 물론 그런 관계에서 당신과 여자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믿었지만, 그것으로 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어디까지나 자존심 문제였죠. 하지만 그래서 삐딱한 마음으로 그 남자와 잔것은 아니에요. 나는 그 당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누군가에게 미칠듯 안기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것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어요. 나는 단지 누군가에게 안겨 외로움을 씻어내고 싶었어요. 왜 그때 불쑥 내 몸에서 그런 욕망이 생겨났는지, 왜 하필 당신이 내 옆에 없을때 다른 남자를 상대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어떤 실수는 때로 우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다주죠.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해요. 당신이 그 사람보다 성적으로 열등하다거나 섹스 어필이 부족하다거나, 내가 당신과의 섹스에 물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내 육체는 그때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굶주려 있었어요. 나로서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어요. 어떠한 이유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저 그렇게 됐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나는 그와 육체 관계를 갖는 동안, 몇 번인과 당신과도 잠자리를 함께했죠. 어쨌든 난 당신을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난 당신에게 안겨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돼버렸어요. 당신도 아마 그 점은 눈치챘을 거에요. 아마도 죄의식 또는 애증의 감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쨌건 다른 여자와 잔 당신을 난 용서하기 힘들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룸을 관두고 자기와 함께 살자고 했어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거였죠. 자기도 가족과 헤어지겠다고 했어요. 조금 시간을 달라고 했죠. 하지만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갑자기 깨달았어요. 이건 옳지못한 관계이고, 나는 이 사람과 함께있으면 안된다라는 것을요. 함께하잔 말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한 욕망의 단편도 남지 않았죠. 그는 내게 외로움을 해소해 줄 창고, 그 이상의 이미를 지니지 못했던 거에요.


나는 늘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물론 나에게도 여러 가지 결점은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일을 거짓말 하거나 자신을 위장하지는 않았어요. 내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해왔죠. 유민씨 몰래 무엇인가를 한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은 나에게는 작은 긍지 같은 것이었죠. 하지만 나는 몇 개월이나 당신에게 치명적인 거짓말을 했고, 그리고서도 그것을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그 사실이 나를 너무 힘들게해요. 나라는 인간이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텅 빈 인간처럼 느껴졌어요. 아마 실제로 난 그런 인간일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일이 또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왜 내가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당신에게 집착을 하게되는 것인가'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만약 그런 질투나 애증의 감정만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당신과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을 거에요. 그리고 나와 그는 편한 술 손님으로 남아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내 질투가 우리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을 붕괴시켜 엉망을 만들어 버렸어요. 당신도, 당신과 함께하던 생활도, 당신이 써주던 시도, 내 직장도.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갈때,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다고 나는 말했죠. 그것을 털어놓은 거에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처음부터 상당히 친밀하고 미묘한 무언가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상실되어 버렸죠. 그 동화같은 시간이 손상당하고 만 것이죠. 내가 그것을 깨뜨려버린 거에요. 나는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요.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나는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나른 존재를 끔찍하게 증오해요. 내가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당신은 알 수 없을거에요. 난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과 허영의 뿌리와 같은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처단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지는 나로서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문제지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부탁이니 나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내 행방을 찾지도 마세요. 나를 잊어버리고 당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세요. 당신한테 어떤 피해도 주기 싫어요. 내가 사라지는것이, 이것만이 서로에게 최선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아무쪼록 내 생각에 동의해 줘요. 오피스텔에 남아 있는 내 옷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버리든지 기부하든지 해줘요. 모든 것은 벌써 과거에 소속되어 있는 거에요. 당신과의 생활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사용했던 것은 이젠 사용할 수 없으니깐.

오피스텔은 12월까지 선불을 걸어 놓았어요. 박노자 시인 책에 현금 넣어뒀어요. 더이상 카드게임은 하지 말았으면 해요. 마트에서 밑반찬을 좀 사다놨어요. 집에서 식사해요. 약은 제 때 챙겨먹고, 운동도 의사가 권하는대로 꾸준히 하길 바래요. 건강해야되요, 꼭.





안녕, Y. 영원히 사랑해요. 행복하길 바래요.  - 혜미
by 혜미 | 2006/09/11 19:1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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